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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일제강점기 역사
대한민국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일제강점기 역사

저자: 이영 l 출판사: 동양북스 l 판형: 188x257 l 발행일: 2024.02.13 l ISBN: 979-11-7210-005-6 l 페이지: 312  

 

정가: 21,500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주권 침탈!
그리고
전 세계에 모범이 되었던 우리의 항일 독립투쟁!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하고 그 의의를 성찰할 때
비로소 오늘을 바르게 조명하고 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 통치를 당한 1910년∼1945년의 시기를 말한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말살까지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는 역사 왜곡을 통한 정신문화의 개조, 한국어 사용 억제, 민족문화유산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이에 맞선 항일 독립투쟁은 전 세계 약소민족의 모범이 될 정도로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어 광복을 이루어냈다. 일제 강점이 우리 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어서 남북 분단까지 초래했다.




 저자 소개 

이영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옛날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기 위해 블로그, 브런치에 다양한 글들을 업로드하고 있으며, 현재 구독자가 20만 명이 넘는 ‘역사돋보기’ 채널을 운영 중이다. 역사는 오감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역사적 현장을 답사하기도 하며, 박제된 과거 사실들을 그저 지식으로 채우기보다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해석적 관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을 담당하였고, 최근에는 영상 제작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경계 없는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추천 댓글 

1. user-*****8qb5s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분들 덕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 mir_c****7
일제강점기 역사는 근현대사에 속하며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아픔과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는 첫 단계라 생각합니다.

3. user-*****6yl9n
선조들의 기쁨과 슬픔의 기록이 역사가 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성공하도록 교훈을 주십니다.

4. ri***jj
일제강점기 부분은 한국인이라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충분히 궁금증을 가질 만하다 생각합니다.

5. user-*****3bn8z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분개하지만 정확히 알기에는 분하면서도 학습으로 치부되어 두루뭉술 알고 있는 시대. 일제 침략기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책 속에서 

그날의 치욕, 경술국치
별수 없이 친일파 대신들은 순종 황제의 서명이나 대한제국의 국새를 대신해 행정 업무에 사용하는 ‘칙명지보’라는 옥새를 찍기로 했다. 이를 눈치챈 순종 황제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는 몰래 칙명지보 옥새를 빼내와 치마폭에 숨겼다.
친일 각료 대신들이 당황하자 경술국적 10인 중 한 명인 시종원경 윤덕영이 순정효황후 윤씨의 치마를 강제로 들춰내고 옥새를 빼앗았다. 이런 회한을 안고 결국 조약문에 도장이 찍혔다. 순종 황제의 서명이나 대한제국의 국새를 대신해 칙명지보 옥새가 날인된 한일병합 조약은 이처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이후 조약문에 순종 황제의 서명이 적혔으나 이는 일제가 위조한 서명일 뿐이다.)

105인 사건
신민회의 주 활동지는 평안도였으며 평안도 내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이 상당수였다. 1911년 헌병대가 평안도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했는데, 대부분이 신민회 간부들이었다. 체포 죄목은 암살 미수였다. 평안도의 민족 가톨릭 신자들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민회는 데라우치 암살 계획을 세운 바 없었다.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은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와 총독부가 꾸민 자작극이었다. 총독부는 총 600여 명을 검거하고 모두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뒤 128명을 기소했는데, 그중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 불렀고,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었다.

3.1운동의 원인과 의의
이 거국적 운동이 왜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10년이 지난 1919년에 이르러서야 일어났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이 거국적인 움직임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
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들의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국권 피탈 10년간 조선인들은 계층, 재산, 성별, 직업, 계급 등을 막론하고 피지배 식민 백성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받으며 생존권을 위협받았다. 1910년에서 1918년까지 무려 9년에 걸친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땅을 빼앗기기도 하고, 자영농은 몰락하고, 소작농도 방랑해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에게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이 강요되고 복지 차별은 노골적이었다. 1910년 회사령 발표로 자산가들이라 해도 재산을 온전하게 보존 운영할 수 없었다. 온갖 조치령으로 조선의 경제권은 침탈당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식민지 조선인 모두가 식민 지배에 시달렸다.

간도참변
청산리 대첩 패전 후 조선인과 독립군 부대를 향한 일제의 보복심은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뒤 훈춘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만주에 군대를 상주시켰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는 훨씬 더 잔혹해졌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간도 지역에서 27일간 일어난 만주 주둔 일본군의 민간인 무차별 학살을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 한다. 당시 약 3,400명 정도의 조선인이 희생당했다고 집계됐지만, 실제 사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강간, 약탈, 방화 등 비인륜적 행위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실력 양성 운동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육 제도를 잘 갖춘 나라일수록 국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정복자가 피정복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한하고 박탈하는 것이다. 일본이 선진화된 교육 체계를 신속하게 정비했던 것에 비해, 강점 직전 조선 백성은 물론 지배층마저도 국제 정세와 신문물에 대해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낙후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보다 조선인 한 명 한 명이 유능해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이념과 운동을 ‘실력 양성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교육 운동이었다.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1932년 1월 이봉창의 의거에 이은 1932년 4월 윤봉길의 의거로 한반도는 물론 중국인들까지 충격에 빠졌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윤봉길을 일컬어 “2억만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해냈다.”라며 그를 극찬했고 ‘역사상 가장 장렬한 사람’이라는 뜻의 ‘장렬천추(壯烈千秋)’란 휘호를 유족에게 전달해 주었다. 장제스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기로 하였고 국제 정상들이 모이는 카이로 회담에서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논의했다. 또한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의 한인 교포들이 임시정부에 후원을 보내오기 시작하면서 임시정부엔 막대한 재정이 쌓이게 되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동아시아를 흔들었으며 적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조선어 금지
일제는 조선을 더 강압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통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조선인을 세뇌하여 민족성을 완전히 멸각해 버리기로 한 것이다. 193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기를 끝내고,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기존에 필수 과목이던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바꾸었다. 곧이어 1943년에는 4차 조선교육령으로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아울러 모든 교육 과정은 전쟁 수행 교육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어린아이부터 세뇌할 요량으로 기존의 ‘소학교’라고 부르던 초등 교육 기관을 ‘황국신민의 학교’를 줄여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출판사 서평 

사회·경제적 수탈을 넘어 민족 말살까지,
이런 식민통치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가슴으로 읽고 뼈에 새기는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

일제는 우리 민족을 어떻게 탄압하고 착취했을까?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들은 어떤 수탈 정책을 폈을까?
폭력과 억압에 맞선 독립전쟁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민족말살정책에 맞선 우리의 민족의식 각성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일제강점기 역사는 해방 후 우리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강점한 다음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도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대한제국을 상대로 일본제국주의가 실시한 식민지 정책의 특징은 ‘한국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의 융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일제의 식민 통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이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은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사실에 입각해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말살까지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는 역사 왜곡을 통한 정신문화의 개조, 한국어 사용 억제, 민족문화유산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 내내 일제의 폭압과 식민 통치에 맞선 독립투쟁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비록 일제를 패망시킨 것은 연합군이었으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불굴의 투쟁은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 식민지들 가운데 오키나와처럼 일제 패망 후 독립을 이루지 못한 곳들도 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목숨 걸고 일제에 저항하고 국제사회에 독립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알렸던 덕에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들은 한국의 독립을 진지하게 거론할 수 있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김구의 임시정부 활약 덕에 장제스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회담 의제로 제시하기도 했다
식민 지배의 역사를 청산하고 한일우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 사실을 직시하고, 그 의의를 성찰하여 과거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하고 해석하여 참다운 한일 우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