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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코노믹리뷰] ‘겉은 멀쩡-속은 끙끙’, 회색지대 중년 늘고 있다 [주태산 서평]
글쓴이 운영자 작성일 2023.05.31 조회수 1005


< 나는 왜 사는 게 힘들까? >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동양북스 펴냄.

교사 K씨는 워커홀릭이다. 그녀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맡은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 건망증이 심해져서 실수가 잦아졌다. 안경이나 지갑, 우산을 어디 두었는지 자주 잊어버리고, 가끔은 겨드랑에 물건을 낀 채로 어디 있는지를 찾는 경우도 많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회의 시간이나 학생 면담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런 일들이 빈번해지자 K씨는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혹시 발달장애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서 인정받는 교사가 됐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어진 것일까?

일본의 정신의학자인 저자는 최근 K 교사처럼 겉으로는 멀쩡하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데도 ‘혹시 나도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병원이나 심리 센터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쩡하고 사회생활도 무난하게 잘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들을 ‘회피형 인간’이라고 설명한다. 자폐증이나 ADHD, 아스퍼거, HSP 등 발달장애와 비슷한 증세가 있지만 장애라고 진단 내리기는 힘든 경계 영역에 해당되므로 ‘그레이존(gray zone)’ 인간 유형이라고도 부른다.

K 교사의 경우도 그레이존에 해당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성실하게 공부했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발달장애가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어린 시절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핍감을 일로 채우기 위해 만성 수면부족이 될 정도로 과로했고, 그 여파로 사소한 실수가 늘어났다고 봐야 한다.

◇ 회피형 인간, 회색 경계지대에서 고통받아

그레이존의 유형은 매우 폭넓다.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성공했으면서도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함이 강하거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거나, 조그마한 소리에도 움찔움찔 놀라거나, 운동신경이 너무 둔해서 사선으로 걷는다거나 하는 등등 다양한 증세가 있다.

저자는 장애도 아닌데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애착 장애’를 품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지적한다. 세계적인 기업가 제프 베이조스나 일론 머스크를 포함해서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 등이 공통적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마음의 그늘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 생각에 집중하면 의자 흔드는 빌 게이츠

책에는 고통을 삶의 에너지로 바꾼 ‘그레이존’ 인간 유형들의 실제 사례도 나온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어린 시절 사회성 발달이 늦어 부모의 걱정을 샀다. 백과사전을 즐겨 읽어 지식은 풍부했지만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성공한 이후에도 어린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의자를 격렬하게 흔드는 버릇이었다. 생각에 집중하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상동운동(常同運動)의 일종으로 무의미한 똑같은 운동을 기계적으로 오래 되풀이해서 계속하는 것이다.

발달심리학자 배런 코언에 의하면, 인간의 뇌에는 공감(empathy) 능력이 뛰어난 E타입, 시스템(system)사고가 우수한 S타입이 있다. 자폐증 환자는 극단적인 S타입이다. 공감 능력이 극히 떨어진다.

S타입은 그레이존 인간 유형 중에서도  많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천재임에는 틀림없지만, 공감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유치원 시절 공원 연못에서 보트 타는 행사가 열렸을 때 모든 아이들이 자기 부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베이조스는 보트의 작동 원리와 구조를 파악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베이조스는 매사 이론적이며, 어떤 일에도 체계적으로 대처한다고 한다. 심지어 여성과 만날 때조차 투자 안건과 만날 기회(딜 플로, deal flow)처럼 우먼 플로(woman flow)를 점점 늘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공감 능력이 약하다 보니 베이조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상대방의 인격을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성 부족한 천재 일론 머스크

테슬라와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남아공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었고, 호기심이 왕성했다. 자기 세계에 빠져들면 옆에서 누가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런 점이 걱정스러워 청력검사까지 받게 했을 정도다.

초등생 시절 하루 열 시간 이상 독서에 몰입했다. 주말에는 반드시 두 권을 책을 읽었다. 학교 도서관 장서를 모두 읽은 뒤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빠져 지냈다.

반면 사회성과 운동능력은 떨어져 친구가 없었고 친동생조차 그와 놀아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애정이나 상냥함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부정적인 태도를 지녀 아들을 괴롭혔다. 머스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행복하지 않았다. 비참했다”고 밝혔을 정도다.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최근 스스로 아스퍼거를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아스퍼거 장애에 걸리면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고, 행동이나 관심분야, 활동분야가 한정되어 있으며 같은 양상을 반복하는 상동적인 증세를 보인다.

◇‘난독증’ 톰 크루즈, 연극무대서 장애 극복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 포터역을 맡은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발달성 협조운동장애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전거를 잘 타지 못했고, 수영도 못했으며, 신발 끈 묶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 놓았다.

래드클리프는 성인이 된 후 연극-영화 양 쪽에서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영화 출연시 장애 극복을 위해 액션 장면을 직접 연기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액션 스타 톰 크루즈도 그레이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읽기와 쓰기를 너무 못해서 선생님에게 자주 지적을 당했다. 전문적인 검사에서는 ‘읽기 장애(난독증, dyslexia)’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그는 잘 읽지 못해서 왕따를 당하거나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된 적도 많았다. 그러자 점점 자신감이 없어져서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 되었다. 이 때 몰두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극단을 직접 만들어 아들을 연극으로 끌어 들였다.

톰 크루즈는 극단에서 대사를 외우고 말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대사를 외울 때는 누군가를 앞에 둔 채 소리 내어 읽었다. 이같은 노력 끝에 읽기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