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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은 없다
그 이상은 없다

저자: 오명근 l 출판사: 동양문고 l 판형: 신국판 변형 l 발행일: 2006.07.29 l ISBN: 89-8300-491-6 l 페이지: 208  

 

정가: 9,500원

이상의 오감도는 왜 조감도가 아니고 오감도가 되었을까? 이름도 왜 엉뚱하게 이상으로 바꿨을까? 김유정은 왜 이상이 제안한 동반자살을 거부했을까? 그리 오래 살지도 못할 거면서 말이다. 만약, 김유정이 이상의 저주 때문에 먼저 죽었다면 이야기가 될까?

이 이야기는 이런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대단한 활동을 펼쳤던 임화가 진짜 미제 스파이인지, 백석의 나타샤가 누구인지, 이태준이 정말 모스크바 티켓이라는 단순한 유혹 때문에 월북했는지, 정지용과 박태원의 월북은 강제 납북인지, 아니면 자진 월북인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인 노천명 모윤숙 최정희의 로맨스는 왜 유부남이어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지 등등.

1편부터 5편까지는 1930년대 인사들의 청춘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모던 경성 시대의 낭만성과 카프의 해체, 그리고 변절에 이은 친일의 과정을 그렸다. 6편에서는 이제 중년으로 접어든 이들이 해방을 맞아 좌우로 대립하는 이념의 격동기를 다루었으며, 마지막 7편에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겪게 되는 그들의 운명과 최후의 순간을 담았다.

이렇게 나름대로 얼개를 맞춰 구성을 짰지만 워낙 이야기가 많다보니 자칫 맥을 놓치게 되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아 중복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이라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팩션 형식을 취했으며, 모든 인물의 유형을 아이러니와 풍자에서 흔히 등장하는 에이론적 인물보다 알라존적 인물에 맞추어 희화화시켰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키취적인 경향을 띠었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부족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문화사적인 의미와 흥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그저 지나친 애정이 빚은 결과라고 독자들은 이해해주길 바란다.


[ 저자 소개 ]

오명근 (吳明根)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충무로 바닥에서 다년간 편집 간행물을 만지작거리며 소일했다. 요즘은 하릴없이 집안에서 빈둥대며 눈칫밥을 먹고산다.
주변에서 한심하다고 혀라도 끌끌 찰라치면 전업 작가라고 박박 우긴다. 그래도 딴에는 여러 간행물의 전문 필진으로, 또 기업 역사물 제작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문화사 등 지난 역사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간혹 엉뚱한 이야기를 끌어내곤 한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damchi1209



[ 책 소개 ]

1부_김유정이 이상보다 먼저 죽은 까닭은? ------------------------------
*오감도인가, 조감도인가 *구본웅의"우인의 초상"*스토커 김유정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2부_카프의 몰락과 임화의 선택 -----------------------------------------------
*임화의 제자 김해경 *박영희, 김기진의 내용형식 논쟁 *이귀례의 붉은 사랑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 *최정희와 지하련의 첫사랑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3부_백석의 나타샤는 누구인가 ---------------------------------------
*백석의"고향"과 테세우스의"미궁" *자야와 최정희의 진실 게임 *통영 명정골 객주집 딸과의 인연 *농사꾼이 된 백석 인터뷰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4부_이태준의 성북동 시대 -------------------------------------------
*이태준의 수연산방 *김용준의 노시산방 *박태원의 실연기 *김환기의 수향산방 *변동림과 김향안의 인생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5부_1930년대 모던 걸의 자유연애 ------------------------------------
*빠사 대회장의 세 여자 *사슴의 시인, 노천명의 사랑 *시몬을 향한 모윤숙의 사랑 *최정희의 두 번째 사랑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6부_해방과 분단 시대의 소영웅주의 -----------------------------------
*모든 조선의 글루미 이맨시페이션 *이태준의 소비에트 여행기 *임화와 카프계 동지들의 활동
*김순남과 함세덕의 월북 *여간첩 김수임 사건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7부_한국전쟁과 모던 시대의 최후 ---------------------------------------------
*임화의 남로당계 몰락 *설정식과 김순남의 최후 *한설야는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이태준과 박태원의 운명 *붉은 완장을 찬 노천명 *이중섭의 잃어버린 소 *김수영의 서랍 속에 있는 불온시의 정체 ? 각주로 읽는 팩트와 픽션



《본문 중에서》

1935년 가을 어느 날, 마산 남성동 임화의 신혼 살림집. 지금으로 따지자면 남성동 대신증권 터가 그 당시 임화의 보금자리였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호시절에 임화와 새색시 지하련이 신혼 단칸방을 이리저리 뒹굴거리면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임화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낙화유수"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지하련은 독서삼매경이다.
"임자, 뭐 보고 있네"?
"시야요. 정희가 보내준 거야요. 임자도 한번 보시겠수"?
"엥? 경상도 계집애는 어디가고 목소리가 와 그러네"?
"호호호, 경성 가 살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지요. 안 그렇수"?
임화가 지하련이 보던 시를 들여다본다. 이상의 「오감도」 제3호.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

다다이즘이로군. 이상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낯설지가 않네.
당대 조선 최고라고 자부하는 임화가 모르는 다다이즘 시인이 다 있다니, 어불성설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임화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번진다. 그럼 그렇지, 김해경이었군. 카프에서 떠오르는 신예로 촉망받으며 동경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연락도 없이 불쑥 김해경이 찾아왔다. 따져 보니 벌써 4년 전 일이다"어이, 이게 누구야? 보성 뺀질이가 여긴 웬 일이네"?
"일본서 돌아 오셨다기에 막 달려왔어요. 그 동안 자자한 명성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야야, 동기끼리 존대가 다 뭐네. 말 놓으라우."
해경이 주뼛주뼛 망설이다가 뭔가를 임화에게 들이민다. 『조선과 건축』이란 왜색 잡지와 낡은 노트다. 잡지를 들춰보니 접힌 부분이 눈에 띈다. 일어로 씌여진 「오감도」란 시다.
"오감도가 뭐야"?
"어, 그건 오탈자야. 조감도가 잘못 인쇄된 거야."
이번엔 노트를 건성으로 들춰본다. 깨알같이 적힌 「건축유한육면각체」란 시가 눈에 띈다. 그리고 별 것 없다는 듯 노트를 탁, 접는다. 임화의 행동거지를 긴장하며 지켜보던 해경은 탁, 소리에 놀라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쪽 팔려서 고개를 조아린다.
"요즘도 술만 처먹으면 이불에다 오줌 싸니"?
"아, 아니…."
"그럼 요즘 뭐하고 사니"?
"학교 졸업하고 총독부에서 건축 기수로 일하고 있어."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더니, 시도 쓰는구나. 근데, 다다이즘이 뭔지 아니"?
"조-금…."_P36-37

그런데 이귀례는 어디 가고, 임화는 왜 지하련 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카프의 방향전환 시기에 단편 서사시의 새 장을 열었던 「우리 오빠의 화로」, 「네거리의 순이」, 「우산받은 요코하마의 항구」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끌려간 오빠의 옥바라지를 하는 누이동생으로, 근로하는 모든 청년의 연인인 순이로, 노동자 동지인 요코하마의 계집애로 그려졌던 이귀례는 어디로 갔는가. 이야기가 좀 길어지지만, 일단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시절 임화의 우산은 박영희였다. 그는 이제 갓 스물의 임화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예감했는지 덜컥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주었다. 그때까지 고아나 다름없던 임화는 박영희의 우산 속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저리 파닥거리며 잘도 놀았다. 카프의 맹원 주제에 다다이즘에 빠져 감상주의에 빠지고, 영화를 한답시고 잔뜩 폼을 잡으며 배우 노릇도 했다. 「유랑」과 「혼가」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그 영화의 꼴이 어찌 되었을까? 당연히 흥행 실패였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보성고보 선배이자 카프의 동지였던 윤기정이 놀렸다.
"꼴 값 하네. 마부 역할을 맡고서 창백한 얼굴로 연기하니 그 영화가 잘도 뜨겠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가가 그깟 딴따라 짓이 다 뭐네. 지금 한창 방향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김기진, 박영희가 대립하고 있는데, 박영희한테 미안하지도 않네."
윤기정의 따끔한 충고가 계기가 되어 임화는 김기진, 박영희의 대립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카프의 논객으로서 정식 데뷔 절차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1926년 김기진, 박영희의 형식이 중요하니, 내용이 중요하니로 촉발된 카프 내의 이념논쟁이 1929년 임화의 「탁류를 항(伉)하여」가 김기진을 공격하고 박영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논쟁의 끝이 아니라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휴지기였으며, 이후 카프는 본격적인 방향전환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_p38